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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 평양 카톨릭 - 성모 수도회 - 모리스 신부 - 수녀회
3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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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ee Order Consolidation
100% Safe Buying Guarant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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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re/Collectibles1939년 - 소화 14년 - 1월 28일 - 평양 발송 - 미국 행
우편요금 : 20전 - 적정요금
- 20전 : 1937년 7월 1일 ~ 1944년 4월 1일까지 미국행 서장 요금
발송 주소 : 평양 상수구리 257 번지 - korea
- korea 만 적은 것이 특이,
일반적으로 chosen japan 명기
발송처 : 평양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 수도회
수녀회는 1932년 6월 27일, 조선 땅에 가톨릭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미국 메리놀 외방전교회 소속 모리스(Morris, John Edward) 몬시뇰 신부가 ‘평양 영유읍 상수구리 257번지’에 자국인 수녀회로 설립했던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이하, 성모수녀회)’라는 수녀원이었다.
도움의 성모’를 주보로 모시고 그 축일인 1932년 6월 27일, 평양시 상수구리 257번지 기와집 두 채를 매입해 개조한 수녀원에서 5명의 입회자와 함께 첫 미사가 봉헌됐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시작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첫 한국인 수녀회 창립
일제강점기 중에서도 가장 끔찍했던 시기인 민족말살통치가 시작될 무렵인 1932년 평양 상수구리에 최초의 한국인 수녀회가 설립됐다.
수녀회의 설립자 존 에드워드 모리스(John Edward Morris) 몬시뇰은 한국 선교에 있어서 여성들의 역할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는 메리놀수녀회에 한국인 수녀회의 회원 양성을 위촉했다.
이렇게 창립된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는 박해시기 수절과 동정을 지키며 교회에 봉사한 여성들의 맥을 이어받고, 민족과 온 인류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을 전하며 봉사하고자 했다.
모리스 몬시뇰은 1889년 1월 1일 미국매사추세츠 팔 리버에서 태어나, 1914년 사제품을 받고 팔 리버 교구의 세인트 조지프 본당 보좌 신부로 7년 동안 사목했다. 1921년 미국 메리놀 외방전교회에 입회한 그는 1923년 한국 선교사로 임명돼 입국했다.
한국어와 풍습을 익힌 그는 평안도 영유본당 주임 신부로 임명됐고, 새로 부임하는 선교사들이 한국어를 배울 수 있도록 어학원을 세우고 각종 교육 사업과 사회사업을 활발히 전개했다.
초대 평양 지목구장 번 신부가 메리놀회 부총장으로 선임돼 본국으로 돌아가자 1930년 모리스 신부는 제2대 평양 지목구장에 임명되는 동시에 몬시뇰로 불리게 됐다.
그는 본당 신설과 사목조직 확충에 전력을 다했고, 청년회 주최로 많은 강연회를 개최해 평양 일대에 천주교가 널리 전교되도록 했다. 아울러 한국인 성직자 및 수도자 성소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모리스 몬시뇰은 평신도 지도자 양성을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33년 ‘제1회 평양 지목구 전교 회장 강습회’를 개최해 성서 해설과 호교론, 교회사, 전례, 주일학교 교리 등을 교육받게 했다. 1934년에는 월간 잡지 「가톨릭 연구」를 창간했고, 이어 ‘평양 지목구 가톨릭 운동 연맹’을 조직해 신자들의 신앙생활 활성화는 물론 문맹 퇴치, 계몽에도 앞장섰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 암울한 시기에서도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는 주변의 어려운 이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고, 사회 선교는 물론 통일 사목, 북방 선교, 외방 선교 등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오고 있다.
창립 당시 평양시 상수구리는 인가가 드문 곳으로 관후리와 인접한 지역이었다. 그러나 평양시가 발전한 후 이 지역은 평양의 중심지로서 서울의 명동과 비교할 수 있는 곳이 되었다. 목 교구장이 임시로 주임을 맡고 있던 관후리 성당과 수녀원과의 거리는 걸어서 7분 정도 걸리는 곳이었다. 수녀원 양옆에는 평양 여고와 개신교에서 운영하는 숭의여학교가 있었다.
고려대역 부근에서 구입 가능합니다.^^
우편요금 : 20전 - 적정요금
- 20전 : 1937년 7월 1일 ~ 1944년 4월 1일까지 미국행 서장 요금
발송 주소 : 평양 상수구리 257 번지 - korea
- korea 만 적은 것이 특이,
일반적으로 chosen japan 명기
발송처 : 평양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 수도회
수녀회는 1932년 6월 27일, 조선 땅에 가톨릭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미국 메리놀 외방전교회 소속 모리스(Morris, John Edward) 몬시뇰 신부가 ‘평양 영유읍 상수구리 257번지’에 자국인 수녀회로 설립했던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이하, 성모수녀회)’라는 수녀원이었다.
도움의 성모’를 주보로 모시고 그 축일인 1932년 6월 27일, 평양시 상수구리 257번지 기와집 두 채를 매입해 개조한 수녀원에서 5명의 입회자와 함께 첫 미사가 봉헌됐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시작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첫 한국인 수녀회 창립
일제강점기 중에서도 가장 끔찍했던 시기인 민족말살통치가 시작될 무렵인 1932년 평양 상수구리에 최초의 한국인 수녀회가 설립됐다.
수녀회의 설립자 존 에드워드 모리스(John Edward Morris) 몬시뇰은 한국 선교에 있어서 여성들의 역할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는 메리놀수녀회에 한국인 수녀회의 회원 양성을 위촉했다.
이렇게 창립된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는 박해시기 수절과 동정을 지키며 교회에 봉사한 여성들의 맥을 이어받고, 민족과 온 인류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을 전하며 봉사하고자 했다.
모리스 몬시뇰은 1889년 1월 1일 미국매사추세츠 팔 리버에서 태어나, 1914년 사제품을 받고 팔 리버 교구의 세인트 조지프 본당 보좌 신부로 7년 동안 사목했다. 1921년 미국 메리놀 외방전교회에 입회한 그는 1923년 한국 선교사로 임명돼 입국했다.
한국어와 풍습을 익힌 그는 평안도 영유본당 주임 신부로 임명됐고, 새로 부임하는 선교사들이 한국어를 배울 수 있도록 어학원을 세우고 각종 교육 사업과 사회사업을 활발히 전개했다.
초대 평양 지목구장 번 신부가 메리놀회 부총장으로 선임돼 본국으로 돌아가자 1930년 모리스 신부는 제2대 평양 지목구장에 임명되는 동시에 몬시뇰로 불리게 됐다.
그는 본당 신설과 사목조직 확충에 전력을 다했고, 청년회 주최로 많은 강연회를 개최해 평양 일대에 천주교가 널리 전교되도록 했다. 아울러 한국인 성직자 및 수도자 성소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모리스 몬시뇰은 평신도 지도자 양성을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33년 ‘제1회 평양 지목구 전교 회장 강습회’를 개최해 성서 해설과 호교론, 교회사, 전례, 주일학교 교리 등을 교육받게 했다. 1934년에는 월간 잡지 「가톨릭 연구」를 창간했고, 이어 ‘평양 지목구 가톨릭 운동 연맹’을 조직해 신자들의 신앙생활 활성화는 물론 문맹 퇴치, 계몽에도 앞장섰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 암울한 시기에서도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는 주변의 어려운 이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고, 사회 선교는 물론 통일 사목, 북방 선교, 외방 선교 등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오고 있다.
창립 당시 평양시 상수구리는 인가가 드문 곳으로 관후리와 인접한 지역이었다. 그러나 평양시가 발전한 후 이 지역은 평양의 중심지로서 서울의 명동과 비교할 수 있는 곳이 되었다. 목 교구장이 임시로 주임을 맡고 있던 관후리 성당과 수녀원과의 거리는 걸어서 7분 정도 걸리는 곳이었다. 수녀원 양옆에는 평양 여고와 개신교에서 운영하는 숭의여학교가 있었다.
고려대역 부근에서 구입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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