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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 독립 운동가 참석 - 태평양 회의 프로그램 북 - 하와이
22 day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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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re/Collectibles1925년 - 6월 30일 ~ 7월 14일 -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 - 1회 태평양 회의 오리지널 프로그램 북
- 총 20 페이지
- 상태 매우 양호
독립을 위해 싸우는 한국 대표로 다수의 인물이 참석.
일본에 의한 참가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무사히 참석.
참가자는 신흥우, 송진우, 유억겸, 김양수, 김종철, 서재필, 헬렌 윤, 필지성
서재필
송진우
신흥우
필지성
헬렌 윤
김종철
김양수
유억겸
윤활란
하와이 뒤흔든 ‘동화정책과 일본어 강요’ 규탄 목소리
미국 민간학술단체 태평양문제연구회가 주도했죠. 개인 자격 참석이었기 때문에 나라 잃은 조선의 대표들도 하와이 동포들의 요청을 받아 동참했습니다. 국가 단위 참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태평양회의에서 입김이 강한 나라는 미국과 일본이었죠. 일본 참석자들은 자국의 식민지정책이 통렬하게 비판당했으니 속이 편할 리가 없었습니다. 속 쓰리기는 미국인들도 비슷했죠. 미국 식민지였던 필리핀의 대표가 튼튼한 정부가 수립되면 독립시켜준다고 해놓고선 왜 약속을 안 지키느냐고 통박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일제는 종교‧교육‧언론계 인사들로 구성된 조선 대표들의 태평양회의 참석을 내켜하지 않았습니다. 총독부가 여권을 내주지 않으려 한 이유였죠. 경성부가 여비를 대주겠다는 제안도 했습니다. 일본 대표로 가라는 뜻이었죠. 이도저도 다 거부하고 독자 참석하자 여객선에서 일본과 조선 대표 사이에 냉기류가 흘렀습니다. 회의 도중에도 독립국만 참가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와 조선 대표들이 돌아가겠다고 짐을 쌀 정도였죠. 그렇지만 조선 대표들은 자체 회의를 여는 등 식민지 조선의 실상을 조금이라도 더 알리려고 머리를 짜냈습니다. 동아일보 1925년 6월 11일자 사설처럼 ‘이런 기회라도 이용해 우리 현실을 현실대로 여실히 발표하고 인도적 양심과 정치적 상식에 호소하는’ 일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고 보았죠.
이맘때 동아일보 주필로 돌아와 있던 송진우는 조선 대표의 한 사람으로 6~8월 3개월 가까이 태평양회의 기사를 썼습니다. 6월에는 일본을 거쳐 하와이로 가는 여정을 4회로 소개했고 7월에는 열하루의 태평양 횡단기를 3회 실었죠. 기차를 타고 부산에 간 뒤 관부연락선으로 시모노세키에 도착해 도쿄로 이동할 때는 18세에 일본어도 제대로 못하면서 유학을 단행했던 패기와 치기를 함께 떠올렸죠. 기차를 긴 집으로 오해했고 벤또(弁当)를 ‘멜똥’이라고 발음하며 처음 타는 인력거 좌석이 위험해 보여 신발 놓는 아래쪽에 올라앉아 웃음거리가 됐던 일들 말입니다. 과거로 떠나는 송진우의 시간여행이었던 셈이죠. 세월이 지나며 눈치는 늘고 기개는 줄었다며 스스로 한탄했지만 독립을 향한 집념은 더 굳어졌습니다.
신흥우의 연설이 동아일보 1면에 실린 때는 대표단이 귀국한 뒤인 7월 31일이었죠. 이제 조선 대표의 활약상이 독자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죠. 송진우는 지상중계 격인 ‘태평양회의에’를 4회, 주요 참석자 인터뷰인 ‘태평양회의를 중심으로’를 6회 연이어 실었습니다. ‘태평양회의를 중심으로’에서는 미국 캐나다 호주의 유력인사들이 3‧1운동에 감동했고 동정심을 품게 됐다는 소감과 응원을 매회 전했죠. 또 하와이 동포들의 감격 어린 환대와 함께 이승만과의 만남도 소개했습니다.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탄핵을 받아 임시대통령에서 면직됐고 그가 이끌던 구미위원부도 폐지됐을 때였죠. 송진우는 ‘내야 무엇을 하였어요. 도리어 동포에게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을 참지 못할 뿐이오’라는 이승만의 심경을 전하면서도 외로움을 딛고 독립운동에 분투하는 그의 진지하고 위대한 인격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고려대역 부근에서 구입 가능합니다.^^
- 총 20 페이지
- 상태 매우 양호
독립을 위해 싸우는 한국 대표로 다수의 인물이 참석.
일본에 의한 참가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무사히 참석.
참가자는 신흥우, 송진우, 유억겸, 김양수, 김종철, 서재필, 헬렌 윤, 필지성
서재필
송진우
신흥우
필지성
헬렌 윤
김종철
김양수
유억겸
윤활란
하와이 뒤흔든 ‘동화정책과 일본어 강요’ 규탄 목소리
미국 민간학술단체 태평양문제연구회가 주도했죠. 개인 자격 참석이었기 때문에 나라 잃은 조선의 대표들도 하와이 동포들의 요청을 받아 동참했습니다. 국가 단위 참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태평양회의에서 입김이 강한 나라는 미국과 일본이었죠. 일본 참석자들은 자국의 식민지정책이 통렬하게 비판당했으니 속이 편할 리가 없었습니다. 속 쓰리기는 미국인들도 비슷했죠. 미국 식민지였던 필리핀의 대표가 튼튼한 정부가 수립되면 독립시켜준다고 해놓고선 왜 약속을 안 지키느냐고 통박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일제는 종교‧교육‧언론계 인사들로 구성된 조선 대표들의 태평양회의 참석을 내켜하지 않았습니다. 총독부가 여권을 내주지 않으려 한 이유였죠. 경성부가 여비를 대주겠다는 제안도 했습니다. 일본 대표로 가라는 뜻이었죠. 이도저도 다 거부하고 독자 참석하자 여객선에서 일본과 조선 대표 사이에 냉기류가 흘렀습니다. 회의 도중에도 독립국만 참가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와 조선 대표들이 돌아가겠다고 짐을 쌀 정도였죠. 그렇지만 조선 대표들은 자체 회의를 여는 등 식민지 조선의 실상을 조금이라도 더 알리려고 머리를 짜냈습니다. 동아일보 1925년 6월 11일자 사설처럼 ‘이런 기회라도 이용해 우리 현실을 현실대로 여실히 발표하고 인도적 양심과 정치적 상식에 호소하는’ 일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고 보았죠.
이맘때 동아일보 주필로 돌아와 있던 송진우는 조선 대표의 한 사람으로 6~8월 3개월 가까이 태평양회의 기사를 썼습니다. 6월에는 일본을 거쳐 하와이로 가는 여정을 4회로 소개했고 7월에는 열하루의 태평양 횡단기를 3회 실었죠. 기차를 타고 부산에 간 뒤 관부연락선으로 시모노세키에 도착해 도쿄로 이동할 때는 18세에 일본어도 제대로 못하면서 유학을 단행했던 패기와 치기를 함께 떠올렸죠. 기차를 긴 집으로 오해했고 벤또(弁当)를 ‘멜똥’이라고 발음하며 처음 타는 인력거 좌석이 위험해 보여 신발 놓는 아래쪽에 올라앉아 웃음거리가 됐던 일들 말입니다. 과거로 떠나는 송진우의 시간여행이었던 셈이죠. 세월이 지나며 눈치는 늘고 기개는 줄었다며 스스로 한탄했지만 독립을 향한 집념은 더 굳어졌습니다.
신흥우의 연설이 동아일보 1면에 실린 때는 대표단이 귀국한 뒤인 7월 31일이었죠. 이제 조선 대표의 활약상이 독자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죠. 송진우는 지상중계 격인 ‘태평양회의에’를 4회, 주요 참석자 인터뷰인 ‘태평양회의를 중심으로’를 6회 연이어 실었습니다. ‘태평양회의를 중심으로’에서는 미국 캐나다 호주의 유력인사들이 3‧1운동에 감동했고 동정심을 품게 됐다는 소감과 응원을 매회 전했죠. 또 하와이 동포들의 감격 어린 환대와 함께 이승만과의 만남도 소개했습니다.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탄핵을 받아 임시대통령에서 면직됐고 그가 이끌던 구미위원부도 폐지됐을 때였죠. 송진우는 ‘내야 무엇을 하였어요. 도리어 동포에게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을 참지 못할 뿐이오’라는 이승만의 심경을 전하면서도 외로움을 딛고 독립운동에 분투하는 그의 진지하고 위대한 인격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고려대역 부근에서 구입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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