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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화/동양화 석현박은용 화백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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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Piece석현박은용화백작품
순수작품38cmx63cm
1944년생 박은용은 1957년 오지호 화백을 만났다. 광주 조대부중(조선대부속중학교)에 입학, 미술부원으로 활동하던 때였다. 오지호(吳之湖,1905~1982)는 누구인가. 오지호는 김환기, 배동신, 양수아, 강용운, 백홍기, 손동 등과 더불어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유화를 공부하고 돌아온 1세대 남도서양화가이다. 맑고 밝은 한국의 풍경에서 빛에 의한 생명의 본질을 보고 그린 작가이다. 1948년 광주미술연구회를 조직했고, 이듬해부터 1960년까지 조선대교수를 지냈다. 무등산 아래 지산동 초가에서 살며, 민족의 따스한 감성과 남도의 밝은 광선, 아름다운 자연환경에 알맞은 한국적인 작품을 그렸다. 그의 문하에서 남도서양화단이 형성되었다.
그가 무등산 청옥동에서 보내며 추구했던 화풍은 청소년시절 영향을 미쳤던 오 화백의 화풍과 흐름을 같이 한다. 전국단위 각종 미전에서 상을 거듭 수상하며, 조대부고를 거쳐 서라벌예대 회화과에 입학했다. 그는 30~40대 소정 변관식(卞寬植,1899~1976)의 화풍을 깊이 공부했다. 소정은 다각적인 방향에서 시점을 구사하여 입체파풍을 보였고, 전통적인 남종화계열에 적묵법을 구사하여 변화를 주었다. 서양화로 그림을 시작한 박은용은 동양화기법을 깊이 공부하며 궁극적으로는 합일하는 방향으로 진전시켰다.
석현(石峴)은 그의 고향. 진도에서는 이런 말이 있었다. “진도 사람치고 글씨 못쓰고, 그림 못그리는 사람 없다.” 예전 사람들은 초동(樵童)들도 그랬다고 했다. 그만큼 예술에 관한 자부심이 어느 곳보다도 높다. 박은용의 원래적 바탕은 문화적으로 동양화, 한국화라 할 수 있다. 어린시절부터 보고 자라며 영향을 받은 문화적 배경이 진도였으니 틀린 말은 아닐 것 같다.
고향 진도에서 교편을 잡았던 박은용은 1977년 광주로 왔다. 전업작가의 길로 접어들었다. 대한민국미술전람회 등을 통해 등용(登龍)의 과정을 보여주었다. 박은용은 오지호의 그림자를 따르듯 무등산속 청옥동에 초가를 마련하고, 화업(畵業)에 집중하였다. 1982년작 ‘청옥동풍경’은 그를 주목하게 한 대표작이다. 미술평론가 장석원은 “관념적 자연관을 탈피하는 시각을 선명하게 드러냈다”며 “농촌의 정경과 사람들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신뢰를 표현하는 그림”이라고 말했다. 운보 김기창은 “이렇게 좋은 작가가 남도에 있었다니”라며 전시회장의 박은용을 격려했다고 한다. 1980년 그가 보냈던 청옥동 시절은 기존의 남도화단과는 다른 공간해석과 대상의 확대로 차별화하면서 그의 존재를 고양할 수 있었다. 붓을 얼마나 화선지에 찍었을까. 건강을 크게 해쳤다고 한다. 그의 무궁한 정진(精進)을 짐작할 수 있다.
극단적일 정도로 농밀한 적묵법의 필치가 1990년대로 접어들면서 변화한다. 그의 작품중 하루 일을 마친 여름날 부엌에서 목욕하는 농촌 아낙네를 그린 그림을 나는 좋아한다. 검은 색 바탕에 농가와 주변풍경이 깔리지만, 1980년대까지는 보지 못했던 화사한 색이 등장한다. 붓을 찍는 것이 아니라, 붓을 그어나가며 곡선을 보여주고 있다. 수도 없이 찍힌 먹으로 여백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던 것에서 여백을 살리고 밝은 색들을 가지고 들어왔다. 보다 선이 단순화했다. 가족이 중심대상으로 그려지고, 농촌풍경이 함께 그려졌다. 무슨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 그는 무등산 청옥동 시절, 정신적으로 힘든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었다. 어린시절 한국전쟁기 고향 마을에서 벌어졌던 인민재판에서 그의 아버지와 형이 희생을 당하였다. 일곱살때 참상을 목도했던 그는 그 충격에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했다. 1980년대에 심했다. 1990년대 무등산에서 전남 화순 두강마을로 옮겼다. 새로운 가족생활이 열리며, 그의 마음도 한결 밝아졌다는 것을 그림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두강마을 시절, 그는 농촌풍경을 주로 그렸다. ‘장날’ ‘완행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 ‘남도의 가을날’ ‘부엉이가 있는 숲’ ‘한가한 날’ ‘수박사려’ ‘평화’ ‘귀로’ 등. 특히 ‘남도의 가을날’은 3m가 넘는 대작이다. 중국 산수화중 ‘소상팔경(瀟湘八景)’
순수작품38cmx63cm
1944년생 박은용은 1957년 오지호 화백을 만났다. 광주 조대부중(조선대부속중학교)에 입학, 미술부원으로 활동하던 때였다. 오지호(吳之湖,1905~1982)는 누구인가. 오지호는 김환기, 배동신, 양수아, 강용운, 백홍기, 손동 등과 더불어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유화를 공부하고 돌아온 1세대 남도서양화가이다. 맑고 밝은 한국의 풍경에서 빛에 의한 생명의 본질을 보고 그린 작가이다. 1948년 광주미술연구회를 조직했고, 이듬해부터 1960년까지 조선대교수를 지냈다. 무등산 아래 지산동 초가에서 살며, 민족의 따스한 감성과 남도의 밝은 광선, 아름다운 자연환경에 알맞은 한국적인 작품을 그렸다. 그의 문하에서 남도서양화단이 형성되었다.
그가 무등산 청옥동에서 보내며 추구했던 화풍은 청소년시절 영향을 미쳤던 오 화백의 화풍과 흐름을 같이 한다. 전국단위 각종 미전에서 상을 거듭 수상하며, 조대부고를 거쳐 서라벌예대 회화과에 입학했다. 그는 30~40대 소정 변관식(卞寬植,1899~1976)의 화풍을 깊이 공부했다. 소정은 다각적인 방향에서 시점을 구사하여 입체파풍을 보였고, 전통적인 남종화계열에 적묵법을 구사하여 변화를 주었다. 서양화로 그림을 시작한 박은용은 동양화기법을 깊이 공부하며 궁극적으로는 합일하는 방향으로 진전시켰다.
석현(石峴)은 그의 고향. 진도에서는 이런 말이 있었다. “진도 사람치고 글씨 못쓰고, 그림 못그리는 사람 없다.” 예전 사람들은 초동(樵童)들도 그랬다고 했다. 그만큼 예술에 관한 자부심이 어느 곳보다도 높다. 박은용의 원래적 바탕은 문화적으로 동양화, 한국화라 할 수 있다. 어린시절부터 보고 자라며 영향을 받은 문화적 배경이 진도였으니 틀린 말은 아닐 것 같다.
고향 진도에서 교편을 잡았던 박은용은 1977년 광주로 왔다. 전업작가의 길로 접어들었다. 대한민국미술전람회 등을 통해 등용(登龍)의 과정을 보여주었다. 박은용은 오지호의 그림자를 따르듯 무등산속 청옥동에 초가를 마련하고, 화업(畵業)에 집중하였다. 1982년작 ‘청옥동풍경’은 그를 주목하게 한 대표작이다. 미술평론가 장석원은 “관념적 자연관을 탈피하는 시각을 선명하게 드러냈다”며 “농촌의 정경과 사람들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신뢰를 표현하는 그림”이라고 말했다. 운보 김기창은 “이렇게 좋은 작가가 남도에 있었다니”라며 전시회장의 박은용을 격려했다고 한다. 1980년 그가 보냈던 청옥동 시절은 기존의 남도화단과는 다른 공간해석과 대상의 확대로 차별화하면서 그의 존재를 고양할 수 있었다. 붓을 얼마나 화선지에 찍었을까. 건강을 크게 해쳤다고 한다. 그의 무궁한 정진(精進)을 짐작할 수 있다.
극단적일 정도로 농밀한 적묵법의 필치가 1990년대로 접어들면서 변화한다. 그의 작품중 하루 일을 마친 여름날 부엌에서 목욕하는 농촌 아낙네를 그린 그림을 나는 좋아한다. 검은 색 바탕에 농가와 주변풍경이 깔리지만, 1980년대까지는 보지 못했던 화사한 색이 등장한다. 붓을 찍는 것이 아니라, 붓을 그어나가며 곡선을 보여주고 있다. 수도 없이 찍힌 먹으로 여백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던 것에서 여백을 살리고 밝은 색들을 가지고 들어왔다. 보다 선이 단순화했다. 가족이 중심대상으로 그려지고, 농촌풍경이 함께 그려졌다. 무슨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 그는 무등산 청옥동 시절, 정신적으로 힘든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었다. 어린시절 한국전쟁기 고향 마을에서 벌어졌던 인민재판에서 그의 아버지와 형이 희생을 당하였다. 일곱살때 참상을 목도했던 그는 그 충격에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했다. 1980년대에 심했다. 1990년대 무등산에서 전남 화순 두강마을로 옮겼다. 새로운 가족생활이 열리며, 그의 마음도 한결 밝아졌다는 것을 그림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두강마을 시절, 그는 농촌풍경을 주로 그렸다. ‘장날’ ‘완행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 ‘남도의 가을날’ ‘부엉이가 있는 숲’ ‘한가한 날’ ‘수박사려’ ‘평화’ ‘귀로’ 등. 특히 ‘남도의 가을날’은 3m가 넘는 대작이다. 중국 산수화중 ‘소상팔경(瀟湘八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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