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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마지막 왕비 가혜 이방자 여사 이도다완
15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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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tique조선 마지막왕비 가혜 이방자 여사님 이도다완입니다.
1세대 도예가 지순탁 유근형 도천 천한봉 선생님등이 도자기를 만드시구 이방자여사님이 수결을 하셨습니다
작품의 수준을 볼때 천한봉 선생님이 만드시구 이방자여사님이 수결을 한 기물로 보입니다
이방자여사님 박스와 오색보까지 있는 미사용 새제품입니다
넓이 14.5cm 높이 8cm 입니다
물레선 로쿠로메가 좋고 전체적으로 홍화가 덮어 이도다완처럼 붉은 색을 띄고있습니다
튐 유 수리없이 상태완벽합니다
일본 국왕 메이지[明治]의 조카인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梨本宮守正] 친왕(親王)의 딸로 태어나, 히로히토[裕仁] 왕세자의 비로 정해졌다. 이후 학습원(學習院)에 입학, 왕비수업을 받던 중 1916년 일본에 볼모로 잡혀와 일본 육군사관학생이 된 영친왕과 정략적 약혼을 하고, 1920년 황태자비가 되었다. 1921년 아들 진(晉)을 낳고, 1922년 한국에 처음 왔을 때 진을 잃는 슬픔을 겪었다. 1931년 다시 아들 구(玖)를 얻고 행복한 생활을 하였으나, 1945년 광복으로 일본왕족에서 제외되어 거처와 재산을 몰수당하고, 고생 끝에 1963년 의식불명이 된 병석의 영친왕과 함께 귀국하였다.
1962년 한국국적 취득 후 1963∼1982년 신체장애자 재활협회 부회장을 지냈으며, 1965년 자행회(慈行會)를, 1966∼1988년 서울칠보연구소를 설립하였다. 1967∼1986년 사회복지법인 명휘원(明暉園) 이사장 및 총재, 1971년 영친왕기념사업회 이사장, 1975년 수원시 자혜학교(慈惠學校) 이사장, 1982년 광명시 명혜학교(明惠學校) 이사장 등을 역임하면서 영친왕의 유지를 받들어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정박아 교육·지체부자유자들의 생계유지를 위한 기술교육 등 육영사업에 정성을 쏟았다. 어린 마사코[方子]가 임신할 수 없다는 일본국의 은밀한 진단결과에 따라 조선왕족의 단절을 꾀한 정략결혼의 희생자이기는 하였으나, "내 조국도, 내 묻힐 곳도 한국"이라는 신념으로 봉사해 왔다.
1989년 4월 30일 창덕궁 낙선재에서 지병으로 비운의 일생을 마치고, 5월 8일 경기도 남양주시 홍류릉의 영친왕묘소에 합장되었다
1세대 도예가 지순탁 유근형 도천 천한봉 선생님등이 도자기를 만드시구 이방자여사님이 수결을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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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자여사님 박스와 오색보까지 있는 미사용 새제품입니다
넓이 14.5cm 높이 8cm 입니다
물레선 로쿠로메가 좋고 전체적으로 홍화가 덮어 이도다완처럼 붉은 색을 띄고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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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국왕 메이지[明治]의 조카인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梨本宮守正] 친왕(親王)의 딸로 태어나, 히로히토[裕仁] 왕세자의 비로 정해졌다. 이후 학습원(學習院)에 입학, 왕비수업을 받던 중 1916년 일본에 볼모로 잡혀와 일본 육군사관학생이 된 영친왕과 정략적 약혼을 하고, 1920년 황태자비가 되었다. 1921년 아들 진(晉)을 낳고, 1922년 한국에 처음 왔을 때 진을 잃는 슬픔을 겪었다. 1931년 다시 아들 구(玖)를 얻고 행복한 생활을 하였으나, 1945년 광복으로 일본왕족에서 제외되어 거처와 재산을 몰수당하고, 고생 끝에 1963년 의식불명이 된 병석의 영친왕과 함께 귀국하였다.
1962년 한국국적 취득 후 1963∼1982년 신체장애자 재활협회 부회장을 지냈으며, 1965년 자행회(慈行會)를, 1966∼1988년 서울칠보연구소를 설립하였다. 1967∼1986년 사회복지법인 명휘원(明暉園) 이사장 및 총재, 1971년 영친왕기념사업회 이사장, 1975년 수원시 자혜학교(慈惠學校) 이사장, 1982년 광명시 명혜학교(明惠學校) 이사장 등을 역임하면서 영친왕의 유지를 받들어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정박아 교육·지체부자유자들의 생계유지를 위한 기술교육 등 육영사업에 정성을 쏟았다. 어린 마사코[方子]가 임신할 수 없다는 일본국의 은밀한 진단결과에 따라 조선왕족의 단절을 꾀한 정략결혼의 희생자이기는 하였으나, "내 조국도, 내 묻힐 곳도 한국"이라는 신념으로 봉사해 왔다.
1989년 4월 30일 창덕궁 낙선재에서 지병으로 비운의 일생을 마치고, 5월 8일 경기도 남양주시 홍류릉의 영친왕묘소에 합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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