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9
Bupyeong, Incheon (1945-73) Ascom City Military Token (T64)
인천 부평 (1945년~73년) 애스컴시티 밀리터리 토큰 (T64)
2 day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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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스컴 시티 ASCOM CITY
미군수지원사령부 ASCOM : Army Service Command
인천광역시 부평구 산곡동 292-1번지에 있는 44만㎡(852,495평) 규모의 땅은 캠프 마켓이라는 미군부대가 자리했던 곳이다.
캠프마켓의 전신은 애스컴시티(ASCOM City : Army Service Command City. 1945.9.16.〜1949.6.29, 1951.8〜1973.6.30)였고,
그 이전에는 일본이 세운 인천육군조병창 부지의 일부였다.
인천육군조병창은 1939년 9월부터 현장사무소와 사령부 본부, 각종 공장 건물을 건설하기 위한 공사를 시작했고, 1941년 5월 5일 문을 열었다. 1945년 8월까지 무기 제조에만 약 9천 명의 조선인을 동원한 것으로 알려진 인천육군조병창은 광복을 맞은 이후 부평시민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광복 후 인천항을 통해 들어와 한반도 남쪽에 주둔한 미군이 인천육군조병창을 군수기지로 활용했기 때문이다.
8월 15일 루즈벨트 미대통령은 일본이 항복을 수락했음을 발표했고, 맥아더 태평양육군사령관에게 항복 수락을 지시하고 공식적으로 전쟁의 종료를 선언했다. 미국은 1945년 8월 27일 미 제24군단을 기반으로 주한미군사령부(하지 중장)를 설치하고, 8월 29일에는 이를 지원하기 위해 제24군수지원사령부(ASCOM 24)를 공식 편성했다. 9월 12일 제24군수지원사령부 본부와 본부중대가 인천에 도착했다. 임무는 군단의 군수보급을 담당하는 조직으로써 군수보급시설, 조직, 장비의 운영을 책임지는 것이었다. 인천항과 남한의 철도를 관할하는 임무도 부여받았다. 9월 16일 제24군수지원사령부가 부평의 일본군 조병창 지역으로 이동했고, 당일 주한미군사령부는 부평을 애스컴시티로 명명했다.
그러다가 인천육군조병창 부지의 주인이 바뀌는 일이 일어났다. 1947년 11월 유엔총회 본회의에서 미소 점령군의 동시 철수에 대한 결의가 통과된 것이다. 이 결의에 따라 1949년 6월 29일 주한미군의 철수를 완료하자 6월 30일 부평지역은 국군이 인수해 유지, 운영했다. 1949년 8월 1일, 국군은 미군이 철수하고 떠난 부평에 부평지역 위수사령부를 설치하고 ‘구 일본군조병창’을 수리해 1950년 6월 15일에 제2조병창으로 개편했다. 그러나 6·25전쟁의 발발로 이 계획은 무산되었다.
9월 15일 미군의 인천 상륙 작전 이후 부평전투를 거쳐 탈환한 후 미군은 인천육군조병창 부지를 용도에 따라 분할했다. 일부(현재 부영공원 자리)는 늘어난 인민군과 중국군 포로를 수용할 포로수용소로, 나머지는 보급부대(ASCOM)가 되었다. 애스컴시티는 부대별로 캠프 마켓, 캠프 그란트, 캠프 타일러, 캠프 해리슨, 캠프 아담스, 캠프 하이예스, 캠프 테일러 등 7개 구역으로 분할 운영했다. 애스컴시티 내 7개 부대는 베트남 전쟁 이후 대부분 철수했다. 애스컴시티는 1973년 해산할 때까지 주한미군의 대표적 군수기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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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수지원사령부 ASCOM : Army Service Command
인천광역시 부평구 산곡동 292-1번지에 있는 44만㎡(852,495평) 규모의 땅은 캠프 마켓이라는 미군부대가 자리했던 곳이다.
캠프마켓의 전신은 애스컴시티(ASCOM City : Army Service Command City. 1945.9.16.〜1949.6.29, 1951.8〜1973.6.30)였고,
그 이전에는 일본이 세운 인천육군조병창 부지의 일부였다.
인천육군조병창은 1939년 9월부터 현장사무소와 사령부 본부, 각종 공장 건물을 건설하기 위한 공사를 시작했고, 1941년 5월 5일 문을 열었다. 1945년 8월까지 무기 제조에만 약 9천 명의 조선인을 동원한 것으로 알려진 인천육군조병창은 광복을 맞은 이후 부평시민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광복 후 인천항을 통해 들어와 한반도 남쪽에 주둔한 미군이 인천육군조병창을 군수기지로 활용했기 때문이다.
8월 15일 루즈벨트 미대통령은 일본이 항복을 수락했음을 발표했고, 맥아더 태평양육군사령관에게 항복 수락을 지시하고 공식적으로 전쟁의 종료를 선언했다. 미국은 1945년 8월 27일 미 제24군단을 기반으로 주한미군사령부(하지 중장)를 설치하고, 8월 29일에는 이를 지원하기 위해 제24군수지원사령부(ASCOM 24)를 공식 편성했다. 9월 12일 제24군수지원사령부 본부와 본부중대가 인천에 도착했다. 임무는 군단의 군수보급을 담당하는 조직으로써 군수보급시설, 조직, 장비의 운영을 책임지는 것이었다. 인천항과 남한의 철도를 관할하는 임무도 부여받았다. 9월 16일 제24군수지원사령부가 부평의 일본군 조병창 지역으로 이동했고, 당일 주한미군사령부는 부평을 애스컴시티로 명명했다.
그러다가 인천육군조병창 부지의 주인이 바뀌는 일이 일어났다. 1947년 11월 유엔총회 본회의에서 미소 점령군의 동시 철수에 대한 결의가 통과된 것이다. 이 결의에 따라 1949년 6월 29일 주한미군의 철수를 완료하자 6월 30일 부평지역은 국군이 인수해 유지, 운영했다. 1949년 8월 1일, 국군은 미군이 철수하고 떠난 부평에 부평지역 위수사령부를 설치하고 ‘구 일본군조병창’을 수리해 1950년 6월 15일에 제2조병창으로 개편했다. 그러나 6·25전쟁의 발발로 이 계획은 무산되었다.
9월 15일 미군의 인천 상륙 작전 이후 부평전투를 거쳐 탈환한 후 미군은 인천육군조병창 부지를 용도에 따라 분할했다. 일부(현재 부영공원 자리)는 늘어난 인민군과 중국군 포로를 수용할 포로수용소로, 나머지는 보급부대(ASCOM)가 되었다. 애스컴시티는 부대별로 캠프 마켓, 캠프 그란트, 캠프 타일러, 캠프 해리슨, 캠프 아담스, 캠프 하이예스, 캠프 테일러 등 7개 구역으로 분할 운영했다. 애스컴시티 내 7개 부대는 베트남 전쟁 이후 대부분 철수했다. 애스컴시티는 1973년 해산할 때까지 주한미군의 대표적 군수기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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