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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산수화의 대가, 미산 허형의 산수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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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Piece작품 크기 : 40.8x108.8 (가로x세로cm)
아버지 소치(小癡) 허련(許鍊)의 그림을 쏙 빼닮은 미산(米山) 허형(許灐)의 산수도입니다.
아버지의 글과 그림을 옮겼기에 상대적으로 저평가를 받고 있지만
호남 남종화를 언급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로 여겨집니다.
그저 흉내만 내는 그림과는 달리 미산(米山) 선생의 기운이 넘치는 필치(筆致)를 산에서, 나무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세월이 지날수록 품격있고, 진중함이 느껴지는 이 작품을 소장하신다면
집안 어느곳에 전시하여도 나만의 전시관이 완성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값진 작품 소장하실 좋은 기회 되시길 바랍니다.
미산 허형 (1862. 8. 16 ~ 1938. 2. 29)
허형(許瀅)은 조선 말기에서 일제 침략기까지 활동한 화가로 본관은 양천(陽川)이고, 본명은 결(潔)이다. 1862년에 전주에서 태어난 후 1867년 진도로 이주하여 성장하였다. 호남 남종화의 실질적 종조(宗祖)라 일컬어지는 소치(小癡) 허련(許鍊)의 넷째 아들로 가업(家業)인 화가의 길을 걸었다. 허형은 진도에 머물면서 부친 허련과 교분이 있는 정약용의 장남인 정학연(丁學淵)에게 시(詩) · 서(書)의 기초를 배웠다. 진도, 강진, 목포에서 활동하였고 근현대 호남 화단에서 중추적 역할을 한 아들 허건(許楗)과 족손 허백련(許百鍊)에게 그림을 가르쳤다.
허련은 큰아들 허은(許溵)이 화업(畵業)을 이을 것으로 여겨 북송의 서화가 미불(米芾)의 성을 따서 미산(米山)이라 호를 지어 주는 등 기대하였다. 그러나 허은이 1867년 5월에 34세의 나이로 요절하자 낙담하여 다른 자식들에게 그림을 가르치지 않았다. 허형의 나이 16세 경 우연한 기회에 허형의 그림 재주를 알게 된 허련은 허형에게 본격적으로 그림을 가르쳐 가업을 잇게 하였고 미산이라는 호도 허형이 쓰게 하였기 때문에, 허은을 큰 미산(大米, 伯米), 허형을 작은 미산(小米, 季米)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후 허련은 그림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허형의 생애는 거주지의 이동에 따라 대략 3기로 구분된다. 즉 진도에 살다 1912년에 강진 병영(兵營)으로 이사하였다가 1921년에 목포로 다시 이사하여 생활하였다. 정만조(鄭萬朝)와 교유하면서 화필 생활에 전념했던 허형은 허련 타계 후 20여 년이 지난 1912년(51세)에 운림산방(雲林山房)을 팔고 진도를 떠났다. 홀로 방랑 생활을 하다가 큰아들을 잃은 후 강진 병영(兵營)으로 이사하였고 결국 목포에 정착하였다. 허형이 진도에서 강진 병영으로 이사한 것과 강진 병영에서 다시 목포로 이사한 것은 모두 생활난을 이겨내기 위한 시도로서 전남지방의 상업과 교역지의 이동에 따른 이사라 볼 수 있다.
허형은 1923년에 개최된 제2회 조선미술전람회 동양화부에 허준(許準)이라는 이름으로 ‘하경산수(夏景山水)’를 출품하여 입선하였고, 1928년 6월 광주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허형은 80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허련의 화법을 본받은 산수화 · 사군자 · 괴석(怪石) 등을 수묵 또는 수묵담채로 그렸다.
아버지 소치(小癡) 허련(許鍊)의 그림을 쏙 빼닮은 미산(米山) 허형(許灐)의 산수도입니다.
아버지의 글과 그림을 옮겼기에 상대적으로 저평가를 받고 있지만
호남 남종화를 언급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로 여겨집니다.
그저 흉내만 내는 그림과는 달리 미산(米山) 선생의 기운이 넘치는 필치(筆致)를 산에서, 나무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세월이 지날수록 품격있고, 진중함이 느껴지는 이 작품을 소장하신다면
집안 어느곳에 전시하여도 나만의 전시관이 완성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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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산 허형 (1862. 8. 16 ~ 1938. 2. 29)
허형(許瀅)은 조선 말기에서 일제 침략기까지 활동한 화가로 본관은 양천(陽川)이고, 본명은 결(潔)이다. 1862년에 전주에서 태어난 후 1867년 진도로 이주하여 성장하였다. 호남 남종화의 실질적 종조(宗祖)라 일컬어지는 소치(小癡) 허련(許鍊)의 넷째 아들로 가업(家業)인 화가의 길을 걸었다. 허형은 진도에 머물면서 부친 허련과 교분이 있는 정약용의 장남인 정학연(丁學淵)에게 시(詩) · 서(書)의 기초를 배웠다. 진도, 강진, 목포에서 활동하였고 근현대 호남 화단에서 중추적 역할을 한 아들 허건(許楗)과 족손 허백련(許百鍊)에게 그림을 가르쳤다.
허련은 큰아들 허은(許溵)이 화업(畵業)을 이을 것으로 여겨 북송의 서화가 미불(米芾)의 성을 따서 미산(米山)이라 호를 지어 주는 등 기대하였다. 그러나 허은이 1867년 5월에 34세의 나이로 요절하자 낙담하여 다른 자식들에게 그림을 가르치지 않았다. 허형의 나이 16세 경 우연한 기회에 허형의 그림 재주를 알게 된 허련은 허형에게 본격적으로 그림을 가르쳐 가업을 잇게 하였고 미산이라는 호도 허형이 쓰게 하였기 때문에, 허은을 큰 미산(大米, 伯米), 허형을 작은 미산(小米, 季米)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후 허련은 그림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허형의 생애는 거주지의 이동에 따라 대략 3기로 구분된다. 즉 진도에 살다 1912년에 강진 병영(兵營)으로 이사하였다가 1921년에 목포로 다시 이사하여 생활하였다. 정만조(鄭萬朝)와 교유하면서 화필 생활에 전념했던 허형은 허련 타계 후 20여 년이 지난 1912년(51세)에 운림산방(雲林山房)을 팔고 진도를 떠났다. 홀로 방랑 생활을 하다가 큰아들을 잃은 후 강진 병영(兵營)으로 이사하였고 결국 목포에 정착하였다. 허형이 진도에서 강진 병영으로 이사한 것과 강진 병영에서 다시 목포로 이사한 것은 모두 생활난을 이겨내기 위한 시도로서 전남지방의 상업과 교역지의 이동에 따른 이사라 볼 수 있다.
허형은 1923년에 개최된 제2회 조선미술전람회 동양화부에 허준(許準)이라는 이름으로 ‘하경산수(夏景山水)’를 출품하여 입선하였고, 1928년 6월 광주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허형은 80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허련의 화법을 본받은 산수화 · 사군자 · 괴석(怪石) 등을 수묵 또는 수묵담채로 그렸다.
봉순이네명품고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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