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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 평양 장로교 선교사 - 존 커티스 크레인 - 신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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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re/Collectibles1943년 (쇼와 18년) 1월 18일 평양 발송 미국 행 봉피 (20전)
수신 : 미국 뉴저지 프린스턴 PRINCETON 대학교.
JOHN CURTIS CRANE 선교사 :
장로교 선교사 존 크레인(John C. Crane)의 유산: 전도자 · 교육자 · 신학자
존 C. 크레인(John Curtis Crane, 한국명: 具禮仁)목사.
그는 미국 남장로회 소속으로 1913년에 내한하여
순천과 평양에서 신학교 교수 등으로 1956년까지 활동했다.
존 크레인은 한국에서 57년 간 사역한 크레인 선교사 가문의 시조일 뿐만 아니라, 그 스스로 전도자·교육자·신학자로서 선교 유산을 우리에게 남겼다. 무엇보다도 전도자로서, 크레인은 1913년에 순천에 배치된 이후, 주로 순천의 서부 지역을 중심으로 교회개척 및 순회 선교활동에 매진했다. 특히 1913년에 창설된 순천 선교지부에 파견된 이후, 언어훈련 기간을 제외한 1917년부터 1937년까지 약 20년 간 크레인은 순천 선교지부와 한국장로교회 순천노회의 서남부 지역, 즉 보성과 고흥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이 지역 대부분 교회의 개척과 성장에 관여했다. 또한 순천 선교지부 내에서 역할과 권위가 커진 1920년대 중반 이후에는 순천, 벌교, 광양 등의 동부 지역 교회를 책임지기도 했다. 이로써 크레인은 해방 전 20년간의 전도자 활동을 통해 순천 선교지부의 존 페어맨 프레스턴과 로버트 코이트와 함께 순천선교지부를 대표하는 삼대 복음 선교사로서 자신을 뚜렷하게 각인시켰다.
크레인은 교육자로서의 유산도 남겼다. 주 사역은 복음 선교사였지만, 언어훈련을 마친 직후 오늘날 매산중고등학교로 알려진 은성학교를 책임졌고, 학교가 일시 폐교된 후에는 이 학교 학생들이 광주로 유학하는 과정을 책임졌다. 1차 안식년 귀국 후인 1921년에도 다시 세워진 매산학교의 임시 교장을 맡았다. 20년간의 순천 전도자 사역을 마친 후 1937년부터는 은퇴한 윌리엄 레널즈를 이어 평양신학교 조직신학 교수가 됨으로써 신학 교육자의 책임도 떠맡았다. 그러나 신사참배 문제로 신학교가 1년 후 폐교되자, 안식년을 떠난 후 다시 귀국한 크레인은 평양외국인학교 교사로 교육사역을 연장했다. 1940년 11월에 대부분의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태평양전쟁의 위협 속에 미국으로 떠났을 때에도 크레인은 약 1년 간 더 평양외국인학교를 지켰다. 전쟁 후 1946년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크레인은 순천 선교지부의 복구와 함께 순천성경학교에서 다시 교육자가 되었다. 1949년에 질병으로 미국으로 귀환한 크레인은 건강악화로 사실상 다시 한국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없어 보였으나, 1954년에 서울 장로교신학교 임시교수로 다시 돌아와 2년 간 교수한 후 영구 귀국했다.
신학자로서의 크레인의 삶은 전도자나 교육자 사역보다는 그 길이와 집중도가 덜했다. 1926년에 두 번째 안식년 기간 중에 모교 유니언신학교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으며 크레인 박사로 불린 그는 1937년 9월부터 1938년 6월까지 평양신학교 교수로서 신학자 사역을 시작했다. 안식년으로 귀국한 후 프린스턴신학교에서 박사후 과정을 하면서 신학자로서의 실력을 더 쌓았다. 그러나 평양신학교 폐교와 태평양전쟁, 건강악화 등의 원인으로 쌓은 신학 실력을 발휘할 기회를 얻지 못하다가, 1949년 이후 미국에서 『조직신학』 을 집필하면서 강의가 아니라 저술이라는 다른 방식으로 한국 신학교육의 발전에 기여했다. 한국에서 1954년부터 번역되어 사용된 이 저술은 평양신학교 조직신학의 기틀을 세운 윌리엄 레널즈의 보수적 장로교 신학 유산을 대체로 충실히 계승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크레인의 유산은 한 사람의 역할로 제한되지 않는다. 교육자, 화가, 식물학자로서의 유산을 남긴 아내, 전도자로 짧지만 의미 있는 흔적을 남긴 남동생 부부, 평생 여성 교육에 헌신한 누나, 의사와 간호사, 저술가로 두드러진 업적을 남긴 아들 내외, 전도자로 순천에서 오래 활약한 막내딸과 사위, 이들은 모두 두 세대 57년에 걸친 사역을 통해 크레인 가문의 유산을 한국, 특히 호남 지역에 눈에 띄게 남겼다.
수신 : 미국 뉴저지 프린스턴 PRINCETON 대학교.
JOHN CURTIS CRANE 선교사 :
장로교 선교사 존 크레인(John C. Crane)의 유산: 전도자 · 교육자 · 신학자
존 C. 크레인(John Curtis Crane, 한국명: 具禮仁)목사.
그는 미국 남장로회 소속으로 1913년에 내한하여
순천과 평양에서 신학교 교수 등으로 1956년까지 활동했다.
존 크레인은 한국에서 57년 간 사역한 크레인 선교사 가문의 시조일 뿐만 아니라, 그 스스로 전도자·교육자·신학자로서 선교 유산을 우리에게 남겼다. 무엇보다도 전도자로서, 크레인은 1913년에 순천에 배치된 이후, 주로 순천의 서부 지역을 중심으로 교회개척 및 순회 선교활동에 매진했다. 특히 1913년에 창설된 순천 선교지부에 파견된 이후, 언어훈련 기간을 제외한 1917년부터 1937년까지 약 20년 간 크레인은 순천 선교지부와 한국장로교회 순천노회의 서남부 지역, 즉 보성과 고흥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이 지역 대부분 교회의 개척과 성장에 관여했다. 또한 순천 선교지부 내에서 역할과 권위가 커진 1920년대 중반 이후에는 순천, 벌교, 광양 등의 동부 지역 교회를 책임지기도 했다. 이로써 크레인은 해방 전 20년간의 전도자 활동을 통해 순천 선교지부의 존 페어맨 프레스턴과 로버트 코이트와 함께 순천선교지부를 대표하는 삼대 복음 선교사로서 자신을 뚜렷하게 각인시켰다.
크레인은 교육자로서의 유산도 남겼다. 주 사역은 복음 선교사였지만, 언어훈련을 마친 직후 오늘날 매산중고등학교로 알려진 은성학교를 책임졌고, 학교가 일시 폐교된 후에는 이 학교 학생들이 광주로 유학하는 과정을 책임졌다. 1차 안식년 귀국 후인 1921년에도 다시 세워진 매산학교의 임시 교장을 맡았다. 20년간의 순천 전도자 사역을 마친 후 1937년부터는 은퇴한 윌리엄 레널즈를 이어 평양신학교 조직신학 교수가 됨으로써 신학 교육자의 책임도 떠맡았다. 그러나 신사참배 문제로 신학교가 1년 후 폐교되자, 안식년을 떠난 후 다시 귀국한 크레인은 평양외국인학교 교사로 교육사역을 연장했다. 1940년 11월에 대부분의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태평양전쟁의 위협 속에 미국으로 떠났을 때에도 크레인은 약 1년 간 더 평양외국인학교를 지켰다. 전쟁 후 1946년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크레인은 순천 선교지부의 복구와 함께 순천성경학교에서 다시 교육자가 되었다. 1949년에 질병으로 미국으로 귀환한 크레인은 건강악화로 사실상 다시 한국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없어 보였으나, 1954년에 서울 장로교신학교 임시교수로 다시 돌아와 2년 간 교수한 후 영구 귀국했다.
신학자로서의 크레인의 삶은 전도자나 교육자 사역보다는 그 길이와 집중도가 덜했다. 1926년에 두 번째 안식년 기간 중에 모교 유니언신학교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으며 크레인 박사로 불린 그는 1937년 9월부터 1938년 6월까지 평양신학교 교수로서 신학자 사역을 시작했다. 안식년으로 귀국한 후 프린스턴신학교에서 박사후 과정을 하면서 신학자로서의 실력을 더 쌓았다. 그러나 평양신학교 폐교와 태평양전쟁, 건강악화 등의 원인으로 쌓은 신학 실력을 발휘할 기회를 얻지 못하다가, 1949년 이후 미국에서 『조직신학』 을 집필하면서 강의가 아니라 저술이라는 다른 방식으로 한국 신학교육의 발전에 기여했다. 한국에서 1954년부터 번역되어 사용된 이 저술은 평양신학교 조직신학의 기틀을 세운 윌리엄 레널즈의 보수적 장로교 신학 유산을 대체로 충실히 계승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크레인의 유산은 한 사람의 역할로 제한되지 않는다. 교육자, 화가, 식물학자로서의 유산을 남긴 아내, 전도자로 짧지만 의미 있는 흔적을 남긴 남동생 부부, 평생 여성 교육에 헌신한 누나, 의사와 간호사, 저술가로 두드러진 업적을 남긴 아들 내외, 전도자로 순천에서 오래 활약한 막내딸과 사위, 이들은 모두 두 세대 57년에 걸친 사역을 통해 크레인 가문의 유산을 한국, 특히 호남 지역에 눈에 띄게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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