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규격: 가로46.5세로34.2(cm)
판매자 이런 간찰을 만나 수집할때는 벅찬마음을 부여안고. 열정에 불타 많은 돈 가리지 않고 보는대로 수집한 것입니다
징비록을 쓰시고 임진왜란때
영의정으로 전란을 총괄지휘하신
서애 류성룡 선생의. 친필간찰입니다
전설적인 인물의 친필을 액자나 미사용으로 보존하는 것은 가문을 빛내는 일이요 자녀교육에도 긍적적 작용을 하면서 자부심을 고취시켜 줍니다
경기가 어려운 시기이어서 저렴한 가격에 내어 놓습니다
2천년전 화식전에 쓰여진 부자되는법 - 무천매귀, 즉 천할때 사고 비싸지면 판다는 원칙에 따라. 이런고급 작품을. 소장해 보시기 바랍니다
서애 류성룡은?
25세 때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 병조 판서를 역임하였고, 정여립 모반 사건 때도 자리를 굳건히 지켰을 뿐 아니라, 동인이었음에도 광국공신(光國功臣)의 녹권을 받았고, 1592년에는 영의정에 올랐다. 정치가 또는 군사 전략가로 생애의 대부분을 보냈으며, 그의 학문은 체(體)와 용(用)을 중시한 현실적인 것이었다. 임진왜란 때는 이순신에게 『증손전수방략(增損戰守方略)』이라는 병서를 주어 실전에 활용하게 하였다.
말년인 1598년에 북인의 탄핵을 받아 관직이 삭탈되었다가 1600년에 복관되었으나, 그 후 벼슬에 나가지 않고 은거하였다. 1605년 풍원부원군에 봉해졌고, 파직된 뒤에는 고향의 옥연서당에서 임진왜란을 기록한 국보 제132호인 『징비록(懲毖錄)』과 『서애집(西厓集)』, 『신종록(愼終錄)』 등을 저술하였다.
그가 병들어 누웠다는 소식을 들은 선조는 어의를 보내 치료케 했지만 유성룡은 65세의 나이에 죽었다. 그런데 하회에서 세상을 떠난 유성룡의 집안 살림이 가난하여 장례를 치르지 못한다는 소식에 수천 명이 그의 빈집이 있는 서울의 마르냇가로 몰려들어 삼베와 돈을 한푼 두푼 모아 장례에 보탰다고 한다.
그가 죽은 뒤 실록의 사관은 그를 평하여 “천자가 총명하고 기상이 단아하였다. 학문을 열심히 익혀 종일 단정히 앉아 있으면서 몸을 비틀거나 기댄 적이 없으며, 남을 대할 적에는 상대의 말에 귀를 기울여 듣고 말수가 적었다”라고 칭찬한 뒤, “이해가 앞에 닥치면 동요를 보였기 때문에 임금의 신임을 오래 얻었으나 곧은 말을 한 적은 별로 없고, 정사를 오래 맡았으나 잘못된 풍습은 구해내지 못하였다”라고 기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