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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 경신 학교 - 3.1 운동 - 군예빈 선교사 새문안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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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re/Collectibles1920년 - 대정 8년 -1월 - 경성 종로 관철동 신행여관
- 박중근 방 조종임 공 - 서대문 발송
- 시내 연동 - 경신중고 내 궁 목사 : 쿤스 - 군 예빈 목사 행
쿤스 [Edwin Wade Koons, 1880~1947] 군예빈(君芮彬),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 목사, 교육가
독립운동가 도움 준 선교사 : 조영신 전도사를 서대문 감옥에서 나오게 해줌.
서울 경신고등학교 제8대 교장으로 임명되어 1939년까지 재직하였다.
쿤스 부인은 1913년 서울에 정착하면서 정신여학교에서 영어와 가사 등을 가르쳤다.
새문안교회 목사로 부임하였다(1916~1920).
1939년 평양 장로회신학교 폐교를 둘러싼 장로교선교공의회 표결에서 미국장로교 선교사 중 유일하게 신사참배 수용과 신학교 폐교 반대를 지지했다.
11월, 경신학교 교장 퇴임 후 서울지부 학생전도 담당, 경신학교 명예교장 및 종교담당 책임자로 경신학교와 계속 관계를 맺었다.
미국 정부 및 선교본부의 철수 권고를 거부, 태평양전쟁 발발로 모든 선교활동이 중단될 때가지 조선예수교서회 판매부 총무(1939~1940), The Korea Mission Field 부편집자(1940.11~1941.11)로 일했다. KMF는 편집자가 귀국한 상태에서 마지막까지 혼자 편집과 발행을 책임졌다.
1938년 3월부터 1941년 12월까지 자신의 라디오 단파방송을 청취, 전쟁 상황과 국외 민족지도자들의 활동을 경신학교 제자 홍익범에게 전달했다. 홍익범은 1943년 11월 “단파방송사건”에 연루되어 2년형을 언도받았으며 1944년 12월 옥사했다.
태평양전쟁 발발 직후인 1941년 12월 8일, 남아있던 선교사들과 함께 감리교신학교에 집단수용되었으며 용산경찰서에서 간첩혐의로 구타와 물고문 등을 당했다.
귀국 직후 샌프란시스코 전시정보국(Office of War Information) 요청으로 대일심리전 일환으로 방송되던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한국어 방송 감독을 시작했다.
언더우드 목사의 후임으로는 경신학교의 교장인 에드윈 쿤스 (군병빈) 목사가 부임하여 강단에 서다가 1920년 12월 26일부터 차재명 목사가 2대 담임목사로 부임하게 되었다.
만세운동 수감 되어있는 독립운동가 도움준 편지
재판과 조영신 전도사의 순국
일제 경찰은 소방대까지 동원하여 만세시위를 폭력적으로 탄압하면서 시위 주동자들을 체포하였다. 시위 첫날인 3월 3일, 2일 저녁 예비검속을 포함하여 주동자 46명과 학생 88명을 검거하였다. 그다음 날인 4일에도 시위대 가운데 60여 명을 체포하였다. 대량 검거에 대한 항의 시위가 잇따르자 5일에는 일제 경찰이 주동 인물을 제외한 170명을 석방하기도 하였지만, 이들의 신병을 넘겨받은 함흥지방법원 검사국은 가혹한 신문을 거쳐 3월 24일 이근재 등 41명을 이른바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함흥지방법원에 기소했다. 이들의 변호는 한국인 변호사 허헌(許憲)과 판사로 있다가 1913년에 사임한 신석정(申錫定)이 맡았다. 함흥지방법원은 4월 21일 이들 41명 모두에게 징역 2년에서 태 90에 이르는 유죄를 언도하였다. 불행히도 그 판결문은 남아 있지 않으나, 그들의 형량은 다음과 같이 1919년 4월 25일 자 「매일신보」에 보도되었다.
징역 2년–이근재(1)
징역 1년 6월–한영호, 홍기진, 조영신, 이순기, 이영화(5)
이들 가운데 주동자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조영신 전도사는 1919년 가을 고문 후유증으로 늑막염에 걸렸다. 여러 달 동안 고생을 하였지만 치료도 받지 못하고 면회도 허락되지 않아 집에 알릴 방도가 없었다. 그러다가 병이 위중해진 1920년 초 아들이 병에 걸려 고생한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부친이 그날로 상경하여 미 북장로회 선교사 쿤스(Edwin W. Koons, 군예빈)의 도움으로 일제 당국과 교섭한 지 11일 만인 1월 13일에 병보석으로 출옥하였다. 곧바로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했으나 14일 새벽 2시경에 별세하였다. 그의 나이 22세였다.
- 박중근 방 조종임 공 - 서대문 발송
- 시내 연동 - 경신중고 내 궁 목사 : 쿤스 - 군 예빈 목사 행
쿤스 [Edwin Wade Koons, 1880~1947] 군예빈(君芮彬),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 목사, 교육가
독립운동가 도움 준 선교사 : 조영신 전도사를 서대문 감옥에서 나오게 해줌.
서울 경신고등학교 제8대 교장으로 임명되어 1939년까지 재직하였다.
쿤스 부인은 1913년 서울에 정착하면서 정신여학교에서 영어와 가사 등을 가르쳤다.
새문안교회 목사로 부임하였다(1916~1920).
1939년 평양 장로회신학교 폐교를 둘러싼 장로교선교공의회 표결에서 미국장로교 선교사 중 유일하게 신사참배 수용과 신학교 폐교 반대를 지지했다.
11월, 경신학교 교장 퇴임 후 서울지부 학생전도 담당, 경신학교 명예교장 및 종교담당 책임자로 경신학교와 계속 관계를 맺었다.
미국 정부 및 선교본부의 철수 권고를 거부, 태평양전쟁 발발로 모든 선교활동이 중단될 때가지 조선예수교서회 판매부 총무(1939~1940), The Korea Mission Field 부편집자(1940.11~1941.11)로 일했다. KMF는 편집자가 귀국한 상태에서 마지막까지 혼자 편집과 발행을 책임졌다.
1938년 3월부터 1941년 12월까지 자신의 라디오 단파방송을 청취, 전쟁 상황과 국외 민족지도자들의 활동을 경신학교 제자 홍익범에게 전달했다. 홍익범은 1943년 11월 “단파방송사건”에 연루되어 2년형을 언도받았으며 1944년 12월 옥사했다.
태평양전쟁 발발 직후인 1941년 12월 8일, 남아있던 선교사들과 함께 감리교신학교에 집단수용되었으며 용산경찰서에서 간첩혐의로 구타와 물고문 등을 당했다.
귀국 직후 샌프란시스코 전시정보국(Office of War Information) 요청으로 대일심리전 일환으로 방송되던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한국어 방송 감독을 시작했다.
언더우드 목사의 후임으로는 경신학교의 교장인 에드윈 쿤스 (군병빈) 목사가 부임하여 강단에 서다가 1920년 12월 26일부터 차재명 목사가 2대 담임목사로 부임하게 되었다.
만세운동 수감 되어있는 독립운동가 도움준 편지
재판과 조영신 전도사의 순국
일제 경찰은 소방대까지 동원하여 만세시위를 폭력적으로 탄압하면서 시위 주동자들을 체포하였다. 시위 첫날인 3월 3일, 2일 저녁 예비검속을 포함하여 주동자 46명과 학생 88명을 검거하였다. 그다음 날인 4일에도 시위대 가운데 60여 명을 체포하였다. 대량 검거에 대한 항의 시위가 잇따르자 5일에는 일제 경찰이 주동 인물을 제외한 170명을 석방하기도 하였지만, 이들의 신병을 넘겨받은 함흥지방법원 검사국은 가혹한 신문을 거쳐 3월 24일 이근재 등 41명을 이른바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함흥지방법원에 기소했다. 이들의 변호는 한국인 변호사 허헌(許憲)과 판사로 있다가 1913년에 사임한 신석정(申錫定)이 맡았다. 함흥지방법원은 4월 21일 이들 41명 모두에게 징역 2년에서 태 90에 이르는 유죄를 언도하였다. 불행히도 그 판결문은 남아 있지 않으나, 그들의 형량은 다음과 같이 1919년 4월 25일 자 「매일신보」에 보도되었다.
징역 2년–이근재(1)
징역 1년 6월–한영호, 홍기진, 조영신, 이순기, 이영화(5)
이들 가운데 주동자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조영신 전도사는 1919년 가을 고문 후유증으로 늑막염에 걸렸다. 여러 달 동안 고생을 하였지만 치료도 받지 못하고 면회도 허락되지 않아 집에 알릴 방도가 없었다. 그러다가 병이 위중해진 1920년 초 아들이 병에 걸려 고생한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부친이 그날로 상경하여 미 북장로회 선교사 쿤스(Edwin W. Koons, 군예빈)의 도움으로 일제 당국과 교섭한 지 11일 만인 1월 13일에 병보석으로 출옥하였다. 곧바로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했으나 14일 새벽 2시경에 별세하였다. 그의 나이 22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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