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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 Dang, Kim Eunho, Ink and wash bird and flower painting
이당 김은호 수묵 화조도
5 hou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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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re/CollectiblesTranslate to English
작품규격 : 38.2*99.2(cm)
이당 김은호(以堂 金殷鎬 1892~1979)선생의 수결과 인장이 있는 작품입니다.
김은호 선생은 수묵담채화 편중의 전통화단에 채색화의 바랍을 일으키며
이당예술의 독보적 실현을 이룬 작가입니다.
이작품은 천위에 참새와 국화꽃이 그려져있습니다.
하늘을 향해 뻗어 올라가는 국화꽃과 높은곳에서 아래를 바라보는 참새의
묘한 대립이 눈길을 끕니다.
국화꽃잎과 참새는 섬세하게 묘사하였으며,
잎은 먹의 농담을 달리하고 부분적으로 푸른빛의 채색을 넣었습니다.
화사하고 깔끔한 화면으로 자유로우면서도 개별적인 구사의 깊이에서
이당의 독보적인 성격을 보여주는 고전적 양식에서 벗어난 현실적 구도와
사실적인 수법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단에 수결과 인장이 잘 찍혀져 있습니다.
좋은 작품을 저렴히 올리고 있습니다.
수집하기 좋은 기회이니 이 기회를 놓치지 마시고
구매하시어 감상해보시기 바랍니다.
김은호(金殷鎬)[1892~1979]는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관교동에서 태어나, 인천 관립 일어 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집안이 몰락하자 자퇴 후 인천 사립 인흥 학교 측량과에 입학하여 1908년 졸업하였다.
1909년 서울특별시 남대문 인근으로 집을 옮겨 이발소 잡역, 인쇄소 직공, 임시 측량 기사 등으로 생계를 이어나갔다.
김은호는 1912년 경성 서화 미술원(京城書畵美術院) 2기생으로 입학하여 3년간 수학하였고,
1915년 어진 화가(御眞畵家)로 채용되어 고종의 초상화를 제작하였다.
김은호는 1919년 3·1 운동 때는 ‘독립 신문’을 배포한 죄로 옥에 갇히기도 했다.
그 후 1925년 일본 도쿄 우에노 미술 학교에서 수학하였고, 1928년에는 순종의 어진을 제작하였다.
김은호는 인물화로 유명해지자 당대의 상류층의 초상화를 그리게 되었고, 부와 명예를 얻게 된다.
하지만 1937년 발표한 「금차봉납도」가 친일 작품이라는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김은호는 2009년 민족 문제 연구소에서 발간한 『친일 인명 사전』 문화/예술 분야에 수록되어 있다.
김은호는 해방 후 1948년 대한민국 미술 전람회에 추천 작가 자격으로 출품하기도 하였으며,
그 뒤에도 계속하여 추천 작가와 심사위원을 역임하며 화단에 영향력을 끼쳤다.
김은호는 작품 활동은 물론 제자 양성에도 힘썼는데, 김은호의 제자들은 1937년
후소회(後素會)를 결성하여 한국 화단 발전에 크게 이바지 했다.
이당 김은호(以堂 金殷鎬 1892~1979)선생의 수결과 인장이 있는 작품입니다.
김은호 선생은 수묵담채화 편중의 전통화단에 채색화의 바랍을 일으키며
이당예술의 독보적 실현을 이룬 작가입니다.
이작품은 천위에 참새와 국화꽃이 그려져있습니다.
하늘을 향해 뻗어 올라가는 국화꽃과 높은곳에서 아래를 바라보는 참새의
묘한 대립이 눈길을 끕니다.
국화꽃잎과 참새는 섬세하게 묘사하였으며,
잎은 먹의 농담을 달리하고 부분적으로 푸른빛의 채색을 넣었습니다.
화사하고 깔끔한 화면으로 자유로우면서도 개별적인 구사의 깊이에서
이당의 독보적인 성격을 보여주는 고전적 양식에서 벗어난 현실적 구도와
사실적인 수법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단에 수결과 인장이 잘 찍혀져 있습니다.
좋은 작품을 저렴히 올리고 있습니다.
수집하기 좋은 기회이니 이 기회를 놓치지 마시고
구매하시어 감상해보시기 바랍니다.
김은호(金殷鎬)[1892~1979]는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관교동에서 태어나, 인천 관립 일어 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집안이 몰락하자 자퇴 후 인천 사립 인흥 학교 측량과에 입학하여 1908년 졸업하였다.
1909년 서울특별시 남대문 인근으로 집을 옮겨 이발소 잡역, 인쇄소 직공, 임시 측량 기사 등으로 생계를 이어나갔다.
김은호는 1912년 경성 서화 미술원(京城書畵美術院) 2기생으로 입학하여 3년간 수학하였고,
1915년 어진 화가(御眞畵家)로 채용되어 고종의 초상화를 제작하였다.
김은호는 1919년 3·1 운동 때는 ‘독립 신문’을 배포한 죄로 옥에 갇히기도 했다.
그 후 1925년 일본 도쿄 우에노 미술 학교에서 수학하였고, 1928년에는 순종의 어진을 제작하였다.
김은호는 인물화로 유명해지자 당대의 상류층의 초상화를 그리게 되었고, 부와 명예를 얻게 된다.
하지만 1937년 발표한 「금차봉납도」가 친일 작품이라는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김은호는 2009년 민족 문제 연구소에서 발간한 『친일 인명 사전』 문화/예술 분야에 수록되어 있다.
김은호는 해방 후 1948년 대한민국 미술 전람회에 추천 작가 자격으로 출품하기도 하였으며,
그 뒤에도 계속하여 추천 작가와 심사위원을 역임하며 화단에 영향력을 끼쳤다.
김은호는 작품 활동은 물론 제자 양성에도 힘썼는데, 김은호의 제자들은 1937년
후소회(後素會)를 결성하여 한국 화단 발전에 크게 이바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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